사이버또래상담원이 인터넷에서 위의 사례를 보고 제게 내밀었을 때, 저는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나 봤던 사이코 연쇄 살인마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어떻게 얘들한테 저렇게 할 수 있냐고, 혹시 저거 누가 장난한거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사또상담원들은 “저런 글을 누가 장난으로 올려요, 경험상 볼 때 이런 글은 사실인 경우가 많아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16살이고 다행히 사또들이 올린 답글을 보고 연락을 해와 우리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직접보지 않으면 확신이 서지 않을 것 같아 사또상담원과 함께 아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11시. 아이는 시간에 맞춰 나왔고, 저는 아이가 약속 시간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올린 글이 사실일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아이를 살피고 있는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사실이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미리 조사 약속을 하고 온 경찰서로 이동했습니다. 아이는 성폭력전담팀의 여성조사관에게 감금, 폭행, 협박으로 고소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조건으로 만난 가해자에게 저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성폭력이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했습니다. 조사는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영상 조사실에서 조사관이 묻는 질문에 아이는 또박또박 상황을 얘기했고, 아이는 단지 상황을 얘기했을 뿐인데 동석한 저와 사또상담원은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모이는 듯 했고 가슴이 벌렁벌렁했습니다. 3시간 정도의 조사가 끝나고 조사관은 ‘조사는 성폭력전담팀에서 했지만 수사는 강력팀에서 하게 될 것이니 며칠 후에 강력팀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습니다. 조사관 역시 기가막혀 하면서 누가 봐도 이 사건은 성폭력이 분명하다며, 아이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미성년자이므로 국선변호사 선임을 요청했습니다. 조사는 잘 끝났고 의연하게 잘 진술해준 아이가 너무나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런 끔찍한 일을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지, 사실 그 자체가 제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모든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사또상담원이 세차례 경찰 조사과정에 동석을 하였고 가해자의 집 앞에서 가해자를 붙잡아 증거까지 확보를 했습니다. 가해자는 33살이었으며, 수사관들 역시 아이의 진술이 일관되고 증거 또한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으므로 구속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 며칠 후 아이가 먼저 인터넷 상에서 말을 걸어왔습니다. 가해자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즉시 수사관에게 가해자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확인을 했습니다. 그동안 조사과정에서 여러차례 만났던 수사관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수사진행 관련해서 말할 수 없다”는 답변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 잡은 범죄자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며, 세 번이나 경찰에 조사동행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사과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경찰의 관료적이고 무시하는 듯한 처사를 상담하는 단체로써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담당 경찰과 담당 검사를 피진정인으로 하여 경찰청, 검찰청, 국민신문고에 진상규명, 잘못이 있다면 책임자 처벌, 흉악범에 대한 조속한 검거, 재발방지대책수립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습니다. 이후 경찰청과 검찰청에서 각각 이 사건을 조사하였고, 우리는 드디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경찰은 성폭력전담팀에서 초동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에 대해 담당검사(담당검사는 성폭력전담검사였습니다.)가 전화로 “피해자 진술을 보니 SM(가학적-피학적) Play로 의심할 여지가 있으니 피해자가 SM Play로 조건만남을 하기로 한 건지 보강 수사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은 우선 피해자를 상대로 SM Play를 전제로 조건만남을 한 적이 있는지, 또 이번 사건이 SM Play를 전제로 한 조건만남인지에 대해 보강수사를 하고, 가해자의 집 앞에서 가해자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에 데려가서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조사과정에서 가해자는 조건만남으로 미성년자와의 성매매는 인정했지만, 감금이나 폭행, 가혹행위 등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임의동행 형식으로 진행된 조사였기 때문에 경찰은 가해자를 귀가조치 할 수 밖에 없었고, 피해자를 상대로 다시 증거보강을 하면서 구속에 대해 자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다음날 가해자에게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전화를 하였고, 가해자가 자진 출두하겠다고 하여 기다렸지만, 그 길로 도망갔는지 그 후로 연락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던 사이코패스가 수사과정에서 도망을 갔는데 이 경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수사관들은 체포영장만 나왔더라면 범죄자를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고 담당검사는 성폭력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 어차피 체포영장을 청구해도 안나왔을 것이고, 수사를 보강하라고 지휘를 한 것은 담당검사로서 할 일을 한 것이라 검·경 모두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6살밖에 안된 아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수사기관을 믿고 자신의 수치와 공포의 경험을 진술했지만 그 범죄자가 도주하여 언제 보복을 할지 모른다는 또다른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현실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더 나아가 8월 현재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또 어디서 어떤 아이를 상대로 이와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고 있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문제는 아이가 조건만남을 통해 성매매를 했다는 데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성매매를 조건으로 성인을 만났다면 아이는 어떤 경우를 당했어도 절대 성폭력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피해 진술을 보면서 16세 소녀와 33세 성인 남성 사이에 가학-피학 Play를 조건으로 성매매를 상호간 합의했는지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는지도 사실 저는 궁금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그런 조건으로 합의를 했다면 저런 일을 당해도 피해자가 될 수 없는 겁니까? 국제법상으로 볼 때 19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의 경우 가해자가 착취하는 과정에서 범한 범죄에 대해 처벌하거나 범죄로 간주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아동·청소년이 법적으로 희생자의 신분이며 이에 따라 대함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역시 성매매의 대상이 된 아동·청소년의 경우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단서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수사기관의 처리는 16세 아이의 조건만남 행위에 더 큰 범죄혐의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수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위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 성구매자의 입장에 수사기관이 더 치우쳐져 있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구속영장을 받기 위해 수사를 보강함에 있어서도 꼭 임의동행 형식의 수사밖에 없었을까도 고민입니다. 경찰은 아주 경미한 사안에 대해서도 48시간 구금권을 남용한다는 지탄을 받고 있는데, 16세 아동을 상대로 한 도주와 증거인멸의 위험이 아주 큰 이같은 극악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왜 긴급체포를 하지 않았을까요? 수사기관의 편견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점점 사실이라는 확신이 커지는 대목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이들이 가출팸이나 자기들의 조직을 구성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성매매를 일삼는 성인 남성을 상대로 법을 핑계로 자신들이 처벌하겠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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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쯤 저는 지방의 한 검찰청에서 이 사건의 진정인으로 조사를 받으러가 조사관에게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는 수사기관의 절차상 문제가 없었음을 설명받고 진정을 취하할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수사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을 대하는 수사기관의 편견 때문에 범죄자의 도주를 사실상 가능하게 했음을 진술하였고, 진정 취하 대신 자처하여 3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진술조서를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재발방지대책으로 검찰을 포함한 수사기관의 담당자들에 대한 여성폭력 관점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명시하도록 하여 진술조서를 수사기록에 편철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날은 무척 더웠고 3시간의 긴 조사를 받으며 검찰청을 나설 때 저는 “아동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회의 도덕성을 알 수 있다”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이 떠오르며, 착잡함과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